dancing in the moonlight
편지 본문
25일 일요일 뜬금없이 편지함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준비라는 의미?
꽤 오랫동안 가끔 받는 카드같은 우편물이 생길때면 언제한번 정리해야지...했었는데 이제야 그 쌓였던 생각들이 액션을 일으킨 것이기도 하다.
국민학교 때부터 받은 모든 것들을 포도상자에 넣어 붙박이 장 깊숙한 곳에 두었었다.
편지, 카드, 쪽지, 성적표 등등.
일일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7~800통은 족히 되리라.
엎어놓고 보니 국민학교 시절 크리스마스 카드부터.
이젠 누군지 얼굴은 커녕 이름도 낯선 친구들의 삐뚤삐뚤한 글씨들.
흰색, 검은 색 도화지에 어설픈 장식을 한. 하나하나 손으로 만든 카드들.
가끔 커튼을 만들어놓거나 입체카드를 흉내낸 정성 가득한 카드들도 있었다.
내용은 참 간단하게 두세줄. 글씨가 커서 많이 쓸 수도 없었겠다.
그리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중학교 시절. 특히 중3.
기연이, 금정이의 편지가 가장 많았는데 매일매일 얘기했을 텐데 편지의 수도 상당할 뿐만 아니라 기본이 2장을 빼곡히 쓴 편지들이다.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기연이의 글씨와 뒤죽박죽한 금정이의 글씨를 보고있자니 그녀들은 뭐하며 살고 있는지..
수업시간에 주고 받았을 쪽지까지 모아두었는데 내 성격도 참...이란 말이 나오더군.
가끔 마리의 편지도 보였다. 글씨가 참 단아하달까..
그리고 진희.
미국에 살고 있을까. 대학때까지 편지를 했었는데 지금은 변호사로 지내고 있을까.
그녀가 녹음해주었던 카세트테잎도 어딘가 있을텐데..
1학년때의 연희.
고등학교 때 순천으로 가서 편지로만 연락을 했었다가 어느새 연락은 끊어졌다가
나중에 사회에서 한번 봤었는데..흠..
가장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던 듯한 고등학교 시절.
모나, 은영, 민영, 중경 등..
미안하게도 그녀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웃는 얼굴만 아련하다.
그 이후엔 거의 없는데.
대학시절 여정, 은경..
현모, 진우 같은 동기녀석들..군바리들
사회에 나와서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니 거의 독보적인 상희.
사실 이번 편지함 정리도 상희의 크리스마스카드가 발단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초등동창들 크리스마스 카드, 영국에서 받았던 카드들.
장장 3시간 넘게 정리를 했다.
이름을 보고 기억이 안나면 과감하게 버리고.
군대편지도 다 버렸다. 이건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를 보니 씁쓸했다.
이 많은 편지들 중에서 지금까지 긴히 연락하는 이가 상희 하나 뿐이라니.
편지들마나 우리 우정 영원하자고 했지만 역시 영원한 것은 없다.
아..성적표도 다 모아두었다.
국민학교 때야 말할 것도 없고.
중1때까지만 해도 아주 우수했고..
고1때 가장 높은 등수.
잘했던 것만 두고 버렸다. ㅎㅎ
나중에 내 아이들이 보게 될 때를 대비했달까.
오래된 현정이의 카드들이 기억에 남았다.
편지는 하나도 없지만 우린 그런 사이니까.
편지가 없기에 아직도 인연이 연결되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 정리해서 작은 상자에 넣고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다 버리게 될 것 같다고.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아니면 다 버리게 될 것 같다고.
하나도 남지않기 전에 지금 내 사람들에게 사랑을, 관심을.
내게 편지를 카드를 보냈던 친구들이니까 그렇겠지만
하나같이 어찌나 칭찬을 해두었던지.
어린 시절 난 참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대학 4학년 때 졸업여행에서 했던 롤링페이퍼까지 그런 것으로 봐서 그 때까지도.
언제 이렇게 비실한 정신과 정서의 결정체가 된 것인지.
고작 사회 생활 때문에 이렇게 망가진 것인지.
편지함을 정리하며 작게나마 위안받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지금의 내가 한심하고 그렇다.